[ Figure Origin ]
백희갤러리 조미향 초대展
2019. 09. 18 - 2019. 10. 15
<Layers of Moments, 145X 145cm, Acrylic on canvas, 2018>
<Layers of Moments, 24.3X33.4cm, acrylic on canvas, 2016>
<작가노트 1>
지도를 버리다 Toss The Map!
조 미 향
- ‘이야기꾼을 믿을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
내 작업은 마치 지도를 던져 버린 여행자의 여행과 같이 진행된다. 빈 화면 앞에서 나는 첫발을 용감하게, 무모하게 내딛는다. 거기서 비로소 사건은 시작된다. 여행자에게 모든 순간은 최초의 것이자 동시에 조금 전의 사건들이 불러온 것이 된다.
지도를 따르는 여행은 진정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해 주지 않는다. 나의 지식들은 후천적으로 내게 덧씌어진 것들이기에 따끈따끈한 날계란 같은 나의 본성과 마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화면에서 학습된 의미를 제거하고 그것을 현재 속에서 직접 경험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를 위하여 나는 화면에 어떤 예정된 목적도 부여하지 않는다. 오로지 나 자신 속에 있는 즉흥성, 역동성에 의지하여 나의 내적, 주관적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한다. 나는 내 화면에 의식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이야기꾼을 믿을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고 했던 D·H 로렌스의 말처럼 나 자신보다는 그림이 지닌, 그림 스스로를 형상화하려는 의지를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림에서 불협화음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색채와 선에 그들끼리 조화를 이루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 고유의 가치를 사랑하기에 그들에게 각자의 발언을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그 불협화음들 속에서 自存이 충족되는 평화, 혼돈 속에서 찾아가는 더 큰 조화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건 존재와 존재가 강요된, 편의적 조화 속에서 침묵하는 것보다는 불협화음 속에서 더 큰 조화의 세계를 힘겹게 찾아가는 것이 ‘관계맺음’의 本領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는 나의 믿음과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나는 붓질(stroke)의 개별적 정체성을 강조하며, 면에 가까운 선까지도 포함한 다양한 선을 구사하려고 한다. 아마도 그 행동적 붓질(gestural stroke) 속에 생래적(生來的)자아의 모습, 무의식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색채에도 아무런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그냥 그들의 재잘거림, 혹은 웅얼거림, 또는 폭언까지도 수용하고 들어주고 싶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마찬가지로 선과 색채도 내게 아무런 요구가 없다. 오직 나의 내적 맥박에 맡길 뿐이다. 붓질은 붓질을 부르고 몸짓은 그 다음 몸짓을 부를 것이다. 붓질과 몸짓들은 그저 그들의 의지대로 겹치거나 얹히거나, 부딪치고 또 비껴가면서 작업과정을 그대로 노출시키게 된다.
이런 緣起的(연기적) 화면은 나를 형식적 구조로부터도 자유롭게 한다. 작업과정이 그대로 노출된 화면은 결과적으로 多層的(다층적)이게 되는데 각 지층 내부의 회화적 요건들 사이에도, 층과 층 사이의 관계에도 형식적 구조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다.
지층 아래의 두더지의 몸짓과 공중의 독수리의 궤적처럼 서로 무심하게 그러나 크게는 함께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을 나는 그려내고 싶다.
<작가노트 2>
無明 속에서 눈짓하기
조 미 향
나는 움직이고 캔버스는 그것을 고스란히 기록한다. 나는 캔버스에 떨어진 나의 몸짓을 부인하지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럴 뿐이다. 그러나 가끔 내 행위, 혹은 내 단순한 몸짓의 기록인 캔버스는 나의 행위보다 우선하는 그들끼리의 질서를 보여준다. 이럴 때 나는 움찔하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그들의 말을 내 행위를 통해 드러낼 뿐이라는, 그래서 나는 마치 신탁을 전하는 사제와 같이 자신의 의지는 조용히 내려놓는다.
누가 내게 명령하는지 모르겠다. 매 순간의 몸짓을, 색채를, 움직임을. 그러나 내게는 명료하다. 이 순간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소리에 해야 한다는 것.
나는 모르겠다. 진정으로 한 이 몸짓의 중첩이 하는 저 말이 그림의 말인지 아니면 내 말인지. 내가 진정 저것을 그리고 있는 주체인가 하는 끈끈한 의문도.
어쩌면 캔버스와 나는 서로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건네고 그것을 상대가 소리 내 주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사실 지칭은 하면서도 나는 그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르겠다. 다만 나와 우주 사이에 한없이 열린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연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질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의 논리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다. 말에 갇힌 세계는 나를 답답하게 한다. 그래서 내 작품에는 어떤 논리도 없다. 그냥 그려 본다. 지도 없이 여행을 나서도 거기에도 한 세상이 펼쳐지지 않는가. 그렇다고 그 여행이, 그 여행지가 무의미한가?
가끔 내 화면을 들여다보면 ‘이건 참으로 독자적인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세상의 논리, 형태, 심지어는 나의 이전 작품들과도 전혀 연관을 맺지 않는) 장면이 내 몸짓으로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 그것이 내가 작업을 하는 이유인 것 같다. 모르겠다. 이 無用의 몸짓이 무엇을 위한 몸짓인지, 그 도달점(이런 게 있기나 하겠나?)이 어디인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세상의 한 귀퉁이에 존재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예술이 세상의 어떤 極點들을 쳐다보는 거라면 나는 이걸 해도 된다고, 아무 말이 안 되도 된다고 나를 다지는 것이 사실 작업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
無用을 위해 애쓰기? 아이러니하기는 하다.